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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틱으로 보다
본 저서는 최근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부상한 바틱(batik)을 통해 인도네시아인의 삶과 문화를 조명하고 있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전통의상이 지닌 사회적 의미는 현대인이 단순히 상상할 수 있는 범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할 수 있다. 의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옷이 착용자의 성, 나이, 지위, 종교, 부, 신분, 혈족, 소속단체, 지역적·종족적 정체성을 전달하는 ‘침묵의 의사소통 형식’이라고 말한다. 삶의 형태와 사회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과 가치가 텍스타일에 담겨있는 사례는 비단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바틱처럼 전통사회뿐만 아니라 21세기의 현대사회에서 조차 단순한 의복의 기능을 넘어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바틱은 본래 저항력을 이용한 염색법을 지칭하지만, 이러한 협의의 의미를 넘어서 사용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바틱을 이용한 의상이나 바틱에 사용된 모티프를 지칭하기도 하고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저자는 바틱이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근본 요인으로 바틱 자체의 특징과 함께 독립 후 단일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국민통합의 기제로서의 역할에 주목한다. 과거 바틱은 심미적 특징과 열대 기후에 적합한 편리성으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한 국가를 대표할 정도의 문화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독립 후 국민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바틱이 국민을 통합하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국민 문화로 부상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 만들기에 수반되는 일련의 과정과 국면별 바틱의 역할을 결합한다. 즉, 내셔널 히스토리(national history) 형성에 필요한 문화적 기억으로서의 바틱(상상, 발명, 기억), 바틱을 통한 제도화(분류, 지식, 규제), 바틱의 상품화(상품화, 확산, 소비)에 주목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정치 지도자의 바틱 활용, 바틱 소유권을 둘러싼 말레이시아와의 갈등, 2009년 바틱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같은 구체적 사례를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 정치 지도자들은 바틱을 통해 지금의 국민국가 영토 안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함께 공유했던 문화가 존재했음을 상상 및 발명함으로써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다. 동시에 현재의 국민국가 영역 밖에 존재하는 말레이시아는 과거 바틱 문화를 함께 향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바틱 소유권 주장에서 배제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공무원들의 바틱 착용을 제도화함으로써 바틱을 통한 국민 만들기를 시도했고, 사회 구성원들은 상업화된 바틱을 소비하는 활동을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 스스로를 시민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종합해보면 바틱은 근대적인 개념의 국민이 형성되는 동안 인도네시아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문화적 매개체로 이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치가 상승되고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바틱은 현재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문화가 되었다. 바틱이 지닌 특징 즉 내부요소에 국가건설 과정에서 국민을 통합하려는 외부작용이 가미되어, 과거 ‘자바(Java)의 영혼’이었던 바틱은 보편화되고 문명화된 ‘인도네시아의 정신’으로 확대되었다.
저자
이지혁
출판사
세창출판사
ISBN
9788984117907
출판된
2018
전문분야
인문학
주제
예술과 문화
지역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