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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된 노동, 변형된 계급
1.
이 책은 울산의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산업노동자들의 일과 생활, 문화와 정체성, 노동조합 활동과 저항의 역사를 들여다봄으로써, 민주화 이후 지난 35년의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이 지나온 행로를 이해하고 오늘날 그들의 집단적 실천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이 책은 노동계급 형성을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과 생산관계의 구조적 위치, 작업장 안팎의 계급상황, 집단적 성향과 문화적 일체감, 조직과 집합행동이라는, 서로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네 가지 계급 층위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파악하려는 이론적 입장의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노동계급 형성이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초기처럼 특정한 역사 발전 단계에서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자본축적의 변화와 임노동관계의 변형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과 퇴보, 재형성과 변형의 과정을 겪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들이 특정한 국면에서 스스로를 단일한 계급으로 만들어가는지는 계급의 네 가지 층위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양상들에 달려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
현대적 공업도시로서 울산의 개발은 멀리 1930년대까지 소급할 수 있지만, 오늘날 금속산업 대공장 노동자의 구조적 계급형성은 권위주의 국가의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더불어 나타난 1970년대 현대그룹의 자본투자에서 본격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울산은 한국 최대의 중공업 도시로 성장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자동차산업과 조선산업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남성 노동자들이 울산의 대공장에 가득 들어찼다. 바로 이들이 이 책의 연구대상인 대공장의 1세대 산업노동자들이다.

‘구조’ 수준의 계급형성에 이어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조직’ 층위의 계급에서 단절적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국가와 자본의 강력한 억압 속에서도 초보적 계급 정체성에 기반한 자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이 탄생했다. 이 시기는 노동계급 내부의 사회적·상징적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업장 안팎에서 동질적인 계급상황이 지배했기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연대적 집단주의의 잠재력이 강했다. 이에 근거해 울산에서 지역노동운동의 연대 조직이 만들어지고 계급형성의 조직적 경계가 보다 확장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의 공식적인 조직적 경계가 동일 기업으로 제한되었고, 비공식적인 노조 간 연대도 부진했다. 결국 울산에서는 자본에 의해 구조화된 노동시장 분절구조에 조응하는 형태로 지역노동운동의 패턴이 형성되었고, 조직적 계급형성의 결정적 국면에서 형성된 조직적 경계는 이후에도 크게 변화하지 못했다.

3.
계급의 변형은 1990년대에 들어서 작업장 안팎의 계급상황 층위에서 가장 크게 일어났다. 작업장 내부에서는 대공장의 기업내부노동시장이 제도화되어 생산직 노동자들의 정착성이 높아졌고,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의 고도성장이 본격화되고 단체교섭이 제도화되며 임금소득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1980년대에 작업장 외부의 노동력 재생산 영역에서 노동자 가구의 가장 중요한 필요욕구는 주택문제의 해결이었다. 노조 결성 이후 1990년대 초중반에 대부분의 대공장 1세대 노동자 가구들은 결혼과 출산, 가족 형성과 양육의 생애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단체교섭과 기업복지 정책의 도움으로 매우 빠르게 자가 보유를 달성하며 노동자 주택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밖에 교육·의료·노후와 관련된 대기업의 기업복지 제도들은 노동자의 생애 단계에 맞게 단체교섭을 통해 꾸준히 확대되면서 노동자 가족의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1990년대는 대공장 노동자의 가족생활과 지역사회의 공간성에도 큰 변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과거 하층신분으로서의 육체노동자의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열망은, 임금소득의 증가에 따라 가구 소비의 영역에서 중산층적 생활양식이 노동계급에 빠르게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와 동시에 대공장 노동자의 집단 주거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노동계급의 문화적 동질성이 점차 희석되었고 계급적 유대의 모태로 작용했던 지역사회의 공간성도 도시 재개발, 현대식 고층아파트 건설, 직주거리의 확대, 기업의 지역사회 관리의 정교화 등의 변화 속에 사라져갔다. 이로써 1980년대에 공장 인근에 조성된 노동계급의 주거공동체들이 빠르게 해체되면서,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이 융합될 수 있는 공간적 기반 자체가 약화되었고, 계급투표 블록을 형성함으로써 도시정치에서 노동의 헤게모니를 확립할 수 있는 인구생태학적 조건도 옅어졌다. 울산과 같은 산업노동자들이 밀집한 공업도시에서 노동계급 형성에 우호적인 공간성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것은, 한국에서 도시 차원의 계급정치가 꽃피우지 못하고 노동운동이 공장 담벼락을 넘어 지역사회와 교통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4.
1997/98년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의 격변기를 지나면서 계급의 변형이 이제 범주·성향·집합행동 수준 모두에서 가시화되었다. 1990년대 말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에서 인수·합병을 통해 독점적 시장 지위를 차지하게 된 현대자동차는 이제 최고경영자의 주도 하에 공세적인 해외투자에 나서며 또 한 번의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변방의 수출기업에서 2000년대를 통과하며 세계 유수의 초국적 자동차 제조업체로 발돋움하며 막대한 이윤을 축적했다. 이에 따라 강력한 교섭력을 보유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임금소득도 전례 없이 상승했다. 그리하여 2010년대에 오면 현대차 노동자는 모름지기 한국의 대표적인 ‘풍요로운 노동자’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공장은 여전히 테일러주의에 입각한 단순반복적 직무, 장시간 노동과 교대근무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그들의 장시간 육체노동은 높은 경제적 보상과 교환되었지만, 정작 공장 밖 생활세계에서의 안락은 대공장 남성 노동자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여가생활의 결핍과 가족생활에서의 주변화는 장시간 노동체제에 얽매인 중년 남성 노동자들의 일반적 삶의 모습이었고, 점차 육체노동자로서 계급적 현실에 부딪히며 살아갔던 ‘공장의 세계’와 중산층의 생활양식과 소비규준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생활세계’ 사이의 간극이 커져갔다. 바로 그 간극이 현대차 노동자들의 특유한 행위 성향, 즉 가족의 개별적 계층상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적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도구적 집단주의 성향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2000년대 이후 고용 불안전성이 일상화되면서 노동계급 내부의 분절은 그들의 성향과 집단 정체성 수준까지 삼투되었다. 계급상황 이질화로 인한 사회적 경계의 구획이 이 시기에 와서는 상징적 경계로까지 확장되었던 것이다. ‘우리/그들’의 구분과 관련된 집단 정체성의 측면에서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위계 서열이 점차 굳어져갔다. 특히 자본의 노동 분절화 전략에 의해 출현한 대공장 내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는 점차 그들을 고용의 완충장치로 다루며 ‘내부의 타자’로 대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그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작업장 내부의 노동정치는 ‘사회적 폐쇄’ 전략에 경도되었고 계급 연대를 추구하는 작업장 정치의 노력들은 실패했다. 작업장 내 계급 연대의 좌초는 자본의 고용 유연화 전략이 낳은 ‘분절된 노동’이 결국 보다 연대주의적인 계급의 형성을 가로막게 되었다는 것을 명징하게 드러내 주었다.

5.
노동자대투쟁 이후 지난 30년간의 노동자 집합행동의 궤적은 조직 수준의 계급에서 어떠한 변형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드러냈다. 금속산업 대공장 중심의 ‘1987년 세대’의 노동운동은 30년 동안 지속적인 저항행동을 보여주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집합행동의 빈도가 감소했고, 연대 행동이나 시민사회와의 연합도 확연히 줄었으며, 저항 레퍼토리가 온건화·규격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최근까지도 집합행동 자체는 상당한 빈도로 나타났지만, 그 대부분은 작업장 스케일에 머물러있는 것이었기에 집합행동의 사회적 파급력은 약해졌다. 이것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사회적·상징적 경계의 변형에 상응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노동계급의 조직적 수준에서의 재형성과 관련해 주목되는 흐름이 이와 동시에 나타났다. 금속산업 대공장 노동자와는 다른 업종과 부문에서 새로운 저항 주체들이 외환위기 이후에 등장하며 울산 지역의 노동자 집합행동의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갔다. 비정규직, 서비스산업,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그들이었다. 세기 전환기에 주변부 노동시장에서 신규로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조직과 집합행동 수준에서 노동계급 재형성의 핵심 주체들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들은 금속산업 대공장 노동자들이 갖추었던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도 보유하지 못했고, 노동운동 전반의 연합적 힘도 약화된 국면에서 아직까지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6.
결론적으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 노동계급은 ‘(조직의) 분산성과 (계급상황의) 이질성의 결합’이 낳는 악조건에 처하게 되었다. 조직의 분산성과 계급상황의 이질성은 서로를 강화하기 마련이다. 즉, 분산적 조직은 계급상황의 이질성을 심화시키며 이렇게 심화된 이질성은 다시 조직의 분산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악순환이 이대로 지속되면 노동계급의 파편화 또는 해체의 단계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국의 산업별 노조운동과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 시도들은 분산성과 이질성의 악순환이 불러올 계급 파편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동계급 재형성의 기획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획은 노동계급 내부의 이질성이 매우 큰 조건에서 조직의 집중화와 조직 확대를 도모하는 것이기에 계급의 재형성은 매우 지난한 과제임은 분명하다. 명실상부한 산업별 노조로의 전환을 통한 조직적 집중화(‘조직적 경계’의 확대)의 노력은 노동계급 내부의 ‘사회적 경계’와 ‘상징적 경계’가 상당한 시기에 걸쳐 구획되고 분절된 이후에야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기대만큼의 성과를 낳지 못하고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조금씩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 시도들과 이와 관련된 다채로운 실험들은 더 이상의 조직률 하락을 막아내고 (이른바 ‘프레카리아트’를 포함한) 새로운 직업과 업종의 노동자들을 ‘집단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계급’으로 만들어내려는 노동운동의 중요한 기획임에는 분명하지만, 아직까지 노동운동의 위기를 반전시킬 동력을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고,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노동운동이 처한 현재이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이 향후 계급의 재형성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조직의 분산성과 계급상황의 이질성의 결합이 낳는 악조건 속에서 이 두 개의 조직적 과제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풀어나가며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체 형성에 성공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형성과 퇴보, 변형과 재형성의 끊임없는 역사 속에서 문제는 언제나 당대의 분절된 노동의 조건 속에서 연대와 단결의 형식을 재구성하고 노동운동의 자원과 역량을 확충할 수 있는 계기와 해법을 이론적·실천적으로 찾는 일이었다.
저자/에디터
유형근
출판사
산지니
ISBN
979-11-6861-097-2 93330
출판년도
1 Jan 2022 – 30 Nov 2022
전문영역
사회과학
주제
사회
지역
대한민국